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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교리-육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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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kcheon 댓글 0건 조회 861회 작성일 13-05-1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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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육바라밀(六波羅蜜)


대승을 실천하는 보살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
그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보살의 영원한 생활 자세이자 완성해야 할 수행의 덕목이다.

‘바라밀’이란 범어 paramita의 음역으로 ‘피안(彼岸)에 이른 여섯 가지 상태’를 의미한다. 궁극적인 것, 완성된 것과도 통하는 말이다. 즉 여섯 가지로 보살이 닦아야 할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육바라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바라밀은 단나(檀那)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시는 자비로 널리 사랑하는 행위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보수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보시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눈다.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가 그것이다.


① 재시(財施) : 재물을 가지고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곧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다.


② 법시(法施) : 남에게 진리를 말하여 착한 일을 하도록 그 마음에 선(善)의 씨를 자라게 하는 일이다. 곧 무지한 사람에게 법(法)과 교(敎) 곧, 진리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착하게 살도록 좋은 일을 하도록 일러주는 일 등이다.


③ 무외시(無畏施) : 남에게 두려워 하는 마음을 없애게 하는 일이다.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일이다.

보시는 이와 같은 세 가지가 그 기본인데 이 보시는 다만 아무런 조건과 집착함 없이 보시하는 일이다. 그 어떤 보시에도 조건이 없음은 물론, 보시를 하였다는 그 생각조차 없어야 한다. 이것은 보살이 가진 조건 없는 자비(慈悲)와 자신과 일체중생이 서로 깊은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마음[同體大悲]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이다.


보살은 받는 사람이나 베푸는 물건이나 가르침, 그리고 희사(喜捨)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에게 베푼다. 오직 원하는 바는 모든 중생을 구하여 불도에 들게 하고 여러 부처님들이 행하신 바를 마음에 새겨 배우고 실천하며 전파할 생각뿐이다. 이것을 마음 속에 아무런 생색이나 모양을 내는 마음이 없는 보시라 하여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한다.

이러한 보시라야 참다운 보시의 완성[布施波羅蜜]이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보시를 받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보살행을 만족시켜 주며 복을 지을 수 있게 하여준다는 복전(福田)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해야 하는 것이며, 이 생각은 보시를 받는 상대가 거꾸로 자신에게 보살행을 베푸는 자리로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보시를 계기로 모든 사람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도록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지계바라밀은 시라(尸羅) 바라밀이라고도 한다. 곧 도덕에 계합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계율을 지켜 범하지 않는 행위이다.

지계는 이처럼 생활의 규범을 지켜 나가는 것으로 자기 중심이 아닌 중생을 위해 생활하는 규범이다. 살생하지 않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이익을 주는 자비를 베풀며, 또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고 부정한 음행, 포악한 말, 허망한 말, 이간하는 말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지계는 남의 것을 탐착하거나 시기, 질투, 성냄 등의 마음을 버리고, 올바르고 참되게 사는 행위를 통칭한다(五戒, 十戒, 250戒, 348戒, 500戒가 있다).

이는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공동의 사회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개인 생활도 규칙과 질서를 잃게 되면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없다. 특히 위대한 목적을 세우고 출가한 승려의 모임인 승단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야 하고, 각 개인도 지켜야 할 윤리의 규범이 있다. 이를 계율이라 한다. 수도하는 불제자가 부처님의 계법(戒法)을 지키지 않고는 불도를 닦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특히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계(戒)로써 스승을 삼아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로서는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의 오계가 있다.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각각 250계, 350계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다.

그러나 지계의 참된 정신은 명시된 계목(戒目)에 한정되지 않고, 삼취정계(三聚淨戒)의 기준에 해당하는 모든 행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삼취정계란 섭율의계(攝律儀戒:제정된 제반 계율을 통한 윤리기준)과 섭선법계(攝善法戒:선한 것이면 무엇이든 모두 행하는 선량한 마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와 섭중생계(攝衆生戒: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원칙에 따르는 기준)가 그것이다.

이러한 계율은 절대자의 권위나 명령에 의해 타율적으로 지키는 것이라기 보다, 효과적인 수행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면적 요구에 의한 자율적 정신으로 지켜야 한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安受苦忍]이다. 우리는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보살은 그러한 경우에도 마음의 동요가 없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한다. ‘사바’란 원래 범어 ‘Sabha’의 음역으로 인토(忍土)라는 의미가 있다. 인토란 참아야 할 일이 많은 땅, 참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땅이란 의미이다. 자신에게 욕되고, 어렵고, 고통스런 많은 일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자신을 해롭게 하는 자들의 악행을 참고 용서하는 내원해인(耐怨害忍)과 자신의 고통은 물론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같이 해결하는 안수고인(安受苦忍)과 모든 일에 기쁨과 슬픔에 흔들리지 말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을 깊이 관찰하여 평등함을 깨닫는 체찰법인(諦察法忍)이 그것이다.

결국 인욕이란 마음 속으로 분노를 품으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밖에 없는 사물의 도리를 관찰하여 마음의 동요를 없애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인욕의 정신으로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과 분노와 질투를 올바르게 처리했을 때, 거기에서 새로운 경지가 보이며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몸과 마음에 게으름이 없이 부지런히 힘쓰라는 의미이다. 정진은 모든 일의 근본이니 정진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미래의 성불을 약속받은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대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그는 주위의 무수한 구원의 손길과 마땅히 가야할 길을 스스로 외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부여된 이 생(生)은 성불의 길로 향하는 거룩한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도 우리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정진’의 두 글자를 외우며, 어려움과 역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더 높은 선(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는 곧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인 것이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는 정신통일 수행방법이다. 곧,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자세히 사유(思惟)하는 수행이란 뜻이다. 선나(禪那)바라밀이라고도 하는 선정바라밀은 번뇌 망상으로 인하여 생기는 번거롭고 소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정지(定止)시켜 흐트러짐을 여의고 마음을 진정시켜 정신을 통일시키는 방편이다. 곧 선정을 정(定) 또는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정신통일이 그 요지이다.


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불교처럼 존재의 실상(實相)을 밝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無知)를 타파하려는 종교에서는 선이 특히 중요한 실천 수행법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한시도 쉬지 않고, 빛깔[色]과 소리[聲]와 향기[香]와 맛[味]과 닿음[觸]과 그밖의 모든 것[法]을 쫓아 분주하게 이끌리어 그 본래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특히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한 물질 문명과 지극히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산업의 구조 속에서 ‘자기’를 잃어가고 있다.

즉 인간과 기계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인간과 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기계의 일부분으로 전락하거나 일에 쫓기는 존재로 변하고 만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상실’이나 소외의 감정을 느낀다. 그 ‘잃어버린 자기’를 따뜻한 인간관계나 자기 내면의 응시 속에서 찾기보다는 더욱 일에 몰입하거나, 광란적인 음악과 무절제한 생활 속에 빠져든다. 결국 ‘잃어버린 자기’를 찾으려는 마음조차도 잊고 현실에서 도피해 버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안정된 마음’에서 얻어지는 참다운 자기 확립의 생활은 더욱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선정바라밀은 바로 ‘안정된 마음’을 갖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사물을 정확하고 투철하게 관찰할 수 있다. 원시 불교에도 사선(四禪)의 수행법이 설해져 있으며, 대승의 수행법에도 중요한 덕목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선정바라밀은 응당 그 마음이 머무는 바 없는[應無所住] 가운데 수행되어야 한다.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지혜바라밀은 반야(般若)바라밀이라고도 한다. 이는 선정으로 얻어진 지혜로서 삿된 지해(知解)와 나쁜 소견을 버리고 참 지혜를 얻는 일이다.

이 지혜는 참된 슬기를 말하는 것으로 범어‘Praja’의 번역이다. ‘praja’는 ‘반야(般若)’라고 음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 분별하고 번뇌를 끊는 정신작용을 초월하여, 일체의 사물이나 도리를 궁극까지 추구함으로써 영원한 진실의 생명, 즉 깨달음에 눈뜰 때 나타나는 예지이다.

반야는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공함을 보고, 그 실상(實相)을 직관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일체의 분별을 떠난 것이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해석된다. 그러므로 지혜바라밀은 지혜가 피안에 이른 것 또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는 평소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고 판단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과 객관의 분별 속에서 얻어지는 분별지(分別智)로서, 지혜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란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나 대립을 떠나 있는 것으로 무분별지인 것이다.
 
이것은 보고 듣고 배워서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통일되고 안정된 마음에서 생겨난 지혜는 모든 것을 옳게 파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마치 맑은 물에 보름달이 비치듯 맑은 마음에 지혜의 달이 어리는 것이다.
분별지는 언제나 대상을 분석하고 상대적인 상태에서만 이해하는 능력이다. 흑(黑)은 백(白)을 전제로 이해되고, 선(善)은 악(惡)을 거울삼아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분별지는 상대적이라는 제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는 상대적 분별지의 제약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사변적 분별지(思辨的 分別智)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산사(山寺)의 어귀에 세워진 일주문(一柱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나게 된다.

‘이 문 안에 들어서면 분별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入此門內 莫存知解].’
곧 반야는 모든 대립 개념을 지양한 절대적 지혜인 것이며, 이는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여섯 가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중심으로 행하여지기 때문에 아낌없는 베품, 자율적인 준법 생활, 끝없는 인내, 굽힐 줄 모르는 정진, 한 없이 심오한 사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권2에서도 ‘마치 대지(大地)에 씨앗을 뿌리면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성장이 있게 되는데, 이 땅을 의지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속에 머물러 성숙함을 얻는다’고 하여 반야바라밀이 보시에서 선정에 이르는 다섯바라밀을 이끌며, 또 그들의 성립기반이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반야바라밀은 이렇게 모든 분별 망념을 초월하여 말할 수 없이 청정한 것이며, 모든 선법(善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며,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또 반야심경에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할 때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놀람이 없고 거꾸로 된 생각[轉倒]을 멀리 떠나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고 하였다. 삼세의 모든 부처가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 것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이다.


소승 불교의 출세간적인 종교적 행위는 대승 불교의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지극히 적극적인 종교적 수행으로 지향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여섯 가지 바라밀은 이상경의 세계인 열반의 세계, 곧 피안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수행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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